뉴스종합 > 문화/예술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 이용악

[원시인의 시로 여는 세상]

기사입력 2022-03-18 오전 8:29:45 입력
페이스북 트위터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 이용악
[원시인의 시로 여는 세상]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이용악

 

 

우리 집도 아니고

일가집도 아닌 집

고향은 더욱 아닌 곳에서

아버지의 침상(寢床) 없는 최후(最後)의 밤은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노령(露領)을 다니면서까지

애써 자래운 아들과 딸에게

한 마디 남겨 두는 말도 없었고

아무을 만()의 파선도

설룽한 니코리스크의 밤도 완전히 잊으셨다

목침을 반듯이 벤 채

 

다시 뜨시잖는 두 눈에

피지 못한 꿈의 꽃봉오리가 갈앉고

얼음장에 누우신 듯 손발은 식어갈 뿐

입술은 심장의 영원한 정지(停止)를 가르쳤다.

때늦은 의원(醫員)이 아모 말 없이 돌아간 뒤

이웃 늙은이 손으로

눈빛 미명은 고요히

낯을 덮었다

 

우리는 머리맡에 엎디어

있는 대로의 울음을 다아 울었고

아버지의 침상 없는 최후의 밤은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시집 분수령(1937) 수록

 

(*자래운: 자라게 한, 키운 *아무을 만 : 아무르 만 *설룽한: 춥고 차가운 *가르쳤다: 가리켰다)

 

-----------------------------------------------------------------------

 

 

오늘은 참 오래된 시 한 편을 읽어봅니다.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라는 시는 이용악 시인이 1930년대에 쓴 시입니다. 시를 읽고 있으면 시적 상황이 눈에 훤히 그려집니다. 옛날부터 시는 말하는 그림이라 했는데 이를 두고 말함 같습니다.

 

화자의 아버지가 고향도 아닌 타향에서 마지막 임종을 맞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자식에게 한 마디 유언도 없이, 삶을 위해 만주벌판을 떠돌다 어느 객지에서 쓸쓸히 맞는 최후의 밤, 침상도 없이 차가운 방에서 목침을 벤 채 이 세상을 하직하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우리민족의 황량한 벌판을 떠올리게 합니다. 의원이 다녀가고 하얀 무명천이 낯을 덮으면 그것으로 이 세상과의 마지막 작별을 고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짐승이나 사람이나 죽음 앞에서 홀로 오직 홀로 자신에게 주어진 고독을 끌어안고 영원한 침묵에 듭니다. 남겨진 이는 울음을 다 울면서 보내지만 정작 그는 눈물 한 방울도 보일 수 없는 것이 삶인가 봅니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은 우리들의 삶을 더욱 애잔하게 이끕니다.

 

아버지의 침상 없는 최후의 밤은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삶과 죽음의 경계 사이에서 우리는 슬퍼해야 하고 또 침묵해야 합니다. 그 모든 순간, 밤을 지새우는 풀벌레 소리는 적막한 비장미를 더욱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최근기사

네티즌 의견28
내용은 200자 이내로 적어야합니다. 기사와 무관한 글은 임의로 삭제 될 수 있습니다.
(스팸방지코드  )
의견
쓰기

최근 가장 많이 본 기사인물

  1. 신낙형
  2. 김경진
  3. 류 자
  4. 김태우
  5. 안길해
  6. 권오륜
  7. 한상숙
  8. 문진국
  9. 박국인
  10. 유윤규
  11. 이철희
  12. 정연석
  13. 신두업
  14. 고성주
  15. 조용구
  16. 김현진
  17. 김윤탁
  18. 장준복
  19. 조남국
  20. 임복순
  21. 임명선
  22. 이경표
  23. 송훈
  24. 최기웅
  25. 김용제
  26. 김동기
  27. 김용연
  28. 박진탁
  29. 조만환
  30. 경만선
최근 가장 많이 본 기사인물은 독자들이 기사인물에 대한
클릭수(읽기)가 실시간으로 적용된 것입니다.

최근 가장 많이 본 기사